크로스로에서 옮김
레위인 콤플렉스
“사모님, 엄마가 이거 갖다 드리래유.”
우리 집 부엌 앞에 친구나 언니 오빠들이 서는 적이 종종 있었다. 아버지는 시골 교회 목사님이었고, 우리 가족은 예배당과 붙어 있는 사택에 살았다. 복숭아가 나는 철, 감을 딸 때, 호박을 거둘 철마다 실과를 들고 심부름을 왔다. 첫 열매는 목사님께 (어쩌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관인 우리 집으로 처음 거둔 열매를 가져오곤 했던 것이다. 그 즈음의 기억이다. 친구 집 부엌에서 여자 애들 여럿이 모여 놀이를 겸한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밀가루를 찾는다고 찬장을 뒤지던 친구 하나가 찬장 깊숙이 있던 커피 병을 꺼내 들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집주인인 친구의 마지막 말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야아, 빨라 넣어놔. 그거 목사님 심방 오실 때만 드리는 거야.” 그 말이 커피 뚜껑에 있던 커다란 별모양 하나와 함께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일들이 익숙할 뿐만 아니라 당연하게까지 여겨지던 어린 시절, 나는 일종의 특권의식인 ‘레위인 콤플렉스’ 같은 걸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목사님 심방 오실 때만 드리는 거야"
이 시대 개신교 목사님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땅에 떨어진 배후는 ‘레위인 콤플렉스’라 부르면 딱 좋은 ‘특권의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특권의식은 성도들의 과도한 섬김이 불러온 부작용이기도 하지만, 목회자 자신에게도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성직, 그 부르심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 아니 부담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지 않은 세속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 구별된 자리. 어쩌면 이런 희생에 대한 보상심리가 ‘특별한 정체감’을 가지게 한 건 아닌지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누구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희생을 많이 했고, 고통을 감내했고, 하나님과 최근접 거리에 있다는 의식, 이런 것들이 목회자들의 정체성에 ‘특권의식’을 심은 것은 아닐까. 교인들로부터 들을 소리 못들을 소리 다 들으면서도 참고, 경제적인 궁핍함을 감내하고, 몸이 상하게 기도하며 교우들을 축복하는데 무슨 특권의식이냐고? 이런 특권 의식 말이다.
대기업 회장 이상을 방불케 하는 권력과 금권을 가진 대형교회 목사님에게로부터 이제 막 신대원에 들어가 목회자 후보생이 된 전도사님에게 이르기까지 ‘특권의식’의 징후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세워 부흥시킨 교회를 내 아들에게 준다는데 무슨 문제냐’며 당당히 세습을 감행하는 목사님은 걸어 다니는 특권의식이라 불러드려도 좋으리라. 어떤 자리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주제의 대화를 나누든지 정답은 자신에게 있다는 듯 가르치고 설교하려드는 목사님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뜻은 다 꿰고 있는 것처럼 단정하는 목사님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끔 이제 갓 신학교에 입학한 파릇한 전도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가 있다. 이런 경우 민망하여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우가 있다. ‘여러분, 인생이 그리 녹록한 게 아닙니다.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 의지해야 합니다’, 이런 식의 멘트를 날리실 때다. 부모님뻘 되는 연배의 교우들을 앉혀놓고 인생의 녹록치 않음을 설파하고 예화를 들 때는 설교만 아니라면 농담을 던져 화제를 돌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이것은 젊은 전도사님의 ‘감각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자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나이도, 인생의 경륜도 뛰어넘어 자신을 높은 곳에 세운 탓이라 본다. 때문에 일상에서 가장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시던 젊은 목사님이 강대상에만 올라가면 꾸중하고 윽박지르는 무서운 어르신이 되기도 한다.
▲ 누가 우리의 목사님들을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 아닌 ‘레위인 콤플렉스’에 물든 부족한 목사님으로 만들었나? ‘주의 사자를 대적하면 안 된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기름 부은 주의 종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 ‘목사님께 축도를 받아야 예배드리고 복을 받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우리 엄마 같은 권사님들이다.‘노멘’ 하는 교인은 물리치고 ‘아멘’만 하는 교인을 찾으시는 목사님, 자신이다.
점점 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안목이 좁아지는 목회자들은 필연적으로 교인들과 진심으로 영혼으로 소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가난한 목회자 후보생이 한 분 있다고 하자. 학비 한 푼 댈 돈은 없지만 권사님들 모이신 기도회 설교에서 예화로 든 것이 공교롭게도 자신의 처지였고, 곧 등록마감인데 준비된 것은 없지만 염려하지 않는다는 식의 얘기였다면. 그런데 자리에는 꼭 넉넉하게 사시는 권사님 한 분 쯤 계시기 마련이고, 설교 후 기도하는 중에 ‘그 학비 네가 드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어떨까? 그래서 결국 그 전도사님은 매 학기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했고 무사히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간증 겸 설교를 확신 있게 전하게 되었다. ‘왜 돈 걱정을 하십니까? 하나님이 다 채워주십니다’ 하면서. 학비가 아니라도 ‘아이 분유 값이 쩜쩜쩜’ ‘대학 간 큰 아이의 방을 얻어야 하는데 목사 아버지가 무슨 돈이 있어서 쩜쩜쩜’ 이런 방식으로 레위 지파 목사님은 ‘하나님이 다 채워주시는 삶’을 사신다 치자. 이렇듯 특별한 은총의 삶을 사시는 목사님들이 맨몸으로 자본주의 세상을 살고 있는 교인들의 삶을 공감하고 함께 울어주며 그들의 영혼에 가 닿는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마이너스 통장의 숫자가 꽉 차는 한계를 비빌 언덕 없이 오락가락 넘나들며 사는 뭇 서민양(羊)들의 삶을 체휼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아무리 설교를 해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질 않는다. 믿음이 없다. 하나님께 믿고 맡기지를 못한다’며 윽박지르기 전에 자신의 양들은 ‘특권’없는 벼랑 끝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 같다. 이들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머니가 느슨한 부자 권사님을 가지지 못했고, 심방과 장례예배 인도 등으로 흘러들어오는 예기치 못한 수입의 통로가 없을 뿐인지도 모른다. 목회자를 위해서 최고급 식당에서 밥을 사는 장로님, 선교헌금이라며 쌈짓돈 모은 것을 내놓는 권사님, 수련회든 무슨 일이든 척척 찬조금을 내놓는 집사님. 목사님들이 ‘특권의식’을 걷어내고 이런 분들을 바라본다면 감동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할 레위인, 콤플렉스에 물들어'
누가 우리의 목사님들을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 아닌 ‘레위인 콤플렉스’에 물든 부족한 목사님으로 만들었나? ‘주의 사자를 대적하면 안 된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기름 부은 주의 종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 ‘목사님께 축도를 받아야 예배드리고 복을 받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우리 엄마 같은 권사님들이다. 그런 말이 성경에 어딨냐며 엄마한테는 대들어도 막상 목사님께는 잘하고 잘 보여야 할 것 같아 마음에도 없는 ‘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라며 과도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권사님의 아들, 딸들이다. 자신의 아이에게는 과자 하나 사 줄 돈이 없는 어려운 형편에 구하기도 어려운 커피를 사다 찬장에 숨겨둔 집사님이다. 남편의 말과 행동에서는 비판꺼리를 백 개도 넘게 찾아낼 수 있지만 목사님의 설교가 아무리 상식에 닿지 않아도 그저 ‘아멘 아멘’만 해야 한다고 믿는 또 다른 집사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찬장에서 꺼낸 커피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마신 목사님, 설교에서 은혜 받았다는 말만 골라서 마음에 새기는 목사님, ‘노멘’ 하는 교인은 물리치고 ‘아멘’만 하는 교인을 찾으시는 목사님, 자신이다.
좋은 마음으로 목사님 잘 섬긴 권사님, 힘들게 설교하고 내려오신 목사님 힘내시라고 ‘설교 은혜 받았다’며 격려하고 순종한 집사님께는 지혜로운 섬김과 순종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 나의 무분별한 칭찬이 ‘사람’인 목사님께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이다. 감사의 마음으로 대접하는 식사가 때로는 그분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분별력 말이다. 무엇보다 목사님들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이 되기 위해서 더 철저한 자기 점검을 하셨으면 좋겠다. ‘일 안하고 기업을 받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거룩한 헌신’ 대신 ‘특별한 권위’의 자리에 자신을 앉혀놓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시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독이 되는 줄 알아 성도들의 칭찬과 고급 식당에서 대접하는 식사를 거절하실 수도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페이스북을 하면서 글을 썼다 하면 글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는 ‘좋아요’가 기본 수백 개 달리는 목회자와 목회자급 인사들을 주의 깊게 본다. 과연 많은 사람의 공감을 한꺼번에 얻어내기에 충분한 감동 있는 통찰을 나눈다. 수많은 ‘좋아요’와 공감의 댓글이 줄을 잇는 이유가 있다. 그리하여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분들이 가끔씩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글이나 표현을 내놓는 것을 본다. 살짝 상식에서 벗어난 글이거나 한 개의 글 안에서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는 표현들이 눈에 띄는 것이다. 나처럼 갸우뚱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전히 그런 글에도 ‘좋아요’는 수백 개씩 붙는다. 그리고 갸우뚱 했던 표현들은 타임라인을 따라 흘러내려가 묻히고 잊힌다. 인기인이 되어가며 인기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맑은 눈은 흐려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특권의식과 스타의식을 키워내는 과도한 나르시시즘으로 스스로의 판단력을 해치지 않도록 더 날카롭게 자기 점검을 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의 특권의식은 오랜 세월을 거쳐 바로 그런 방식으로 견고해졌던 것 아닐까? ‘은혜 받았습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해 주세요’에 매몰되면서 한두 번 씩 눈에 띄지 않는 판단의 실수를 하고, 그것이 성도들의 특별 대접 속에 묻히고, 더 많은 판단의 오류들이 생겨나지만 ‘주의 종’ 대접으로 다시 묻히고, 반복되고 또 묻히면서 돌아오지 못할 ‘특별한 강’을 건너게 된 것은 아닐까? 이적을 베풀고 사람들이 열광할 즈음엔 늘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하셨던 예수님을 떠올린다. ‘예수님, 은혜 받았습니다. 예수님, 완전 감동입니다. 예수님, 좋아요x100입니다.’ 이런 것들을 피하여 대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신 것 아닐까?
나는 레위인의 여자다. 아버지도 남편도 동생마저도 목사여서 레위인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버지 덕에 처음 나고 잘생긴 과일을 얻어먹었고 남편 덕에 고급 식당에서 귀빈대접 받으며 밥을 먹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친구 집 찬장에서 발견한 커피가 내 아버지의 몫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불편함도 있지만 여전히 으쓱해지는 어깨를 어쩔 수 없다. 레위인의 여자는 ‘사모님, 목사님 설교 좋았다고 전해주세요’ 라는 권사님의 한 마디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 커밍아웃 해보는 것이다. 특권의식을 거둬내는 일은 드러내는 일부터 시작해야겠기에 말이다.
정신실 오랫동안 블로그를 통해 깊은 소통과 마음의 울림을 나눠오고 있는 ‘한결같은 블로거’이며, 최근에는 연애를 꿈꾸는 이 땅의 모든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오우~연애'(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연애를 주옵시고)를 출간해 작가로서의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http://larinari.tistory.com)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녀의 블로그에서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통해 천상의 빛을 담아내는 비범한 시선을 만날 수 있다.
'신앙 이야기 > 교회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택 단상 (0) | 2012.12.24 |
---|---|
국가에 대한 청지기직분 (0) | 2012.12.15 |
우리교회는 주차 잘 하고 있어요? (0) | 2012.11.09 |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기억할 수도 (0) | 2012.11.01 |
어느 할머니의 기도 (0) | 2012.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