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이야기/교회 이야기

교회에 존재하는 계급

junihome 2010. 10. 22. 16:29

교회에 존재하는 계급
교회 안의 계급 의식

 

뉴스앤조이 정준영

 

 

교회에 계급이 존재한다.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말이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직후부터 사람들은 계급을 만들어 오기 시작했다. 선지자를 부담스러워 하여 선지자 대신 왕을 구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 같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도 그들의 모임 안에 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제를 위해, 그리고 그 말씀의 가르침을 위해, 그리고 예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자연히 보이는 교회가 형성되었다. 베드로의 유해 위에 찬란한 교회를 세우고 또 그를 중심으로 수많은 교회도 세웠다. 그 교회들은 결국 인간의 교회로 변모하게 되었고 결국은 그로 인해 인간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한 계급이 필연적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신본주의를 주창하던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본주의적인 교회가 발전하게 되고, 그래서 암흑시대가 되고 말았다.

왕을 구하는 인간들은 지상의 예수를 만들고 그를 교황으로도 칭한다. 그리고 원래의 예수의 가르치심과는 별로 상관없는 직분을 발전시켜 왔다. 그 의미도 바꾸어 버렸다. 그로 인해 탄생된 왕과 그 주위의 가신 그룹들의 타락으로 세상보다 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고, 인본화 된 교회로 변질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회의 본모습을 파악한 이들은 종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 인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몇백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다시 그보다 더한 누룩이 침투해 들어오고 점점 더 그 정도가 심해져 왔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무감각해지기도 하고 나아가 당연하게도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도저히 스스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고착화된 형태로 변질되었고, 나아가 그 세상적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인정까지 받게 되었다. 섬김의 자리를 왕의 자리로 점차 변질시켜 왔다. 그 책임은 왕 된 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은 스스로 그 백성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없을 때,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서는 그 변질된 체제가 교회의 본질로 오해되어 그로 인해 교회의 주인 된 하나님의 이름까지 오염되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국은 한국 사람들의 종교성으로 인해 기독교가 전래된 후 100년 만에 정말 성령님의 역사를 거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국 고유의 유교적 관습, 왕권 통치의 잔영으로 자연히 계급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그것은 결코 계급이 아니었고 그저 섬김을 표현하는, 그리고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의미만을 지니고 있었다. 조금의 깨끗지 못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나, 그것이 결코 전체를 타락시키지는 못했다.

계급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높고 낮음, 그리고 그로 인한 권위와 권세, 그리고 그 권위와 권세가 적용되어지는 대상이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먼 거리가 있는 것이다. 경제 발전, 기독교인의 인구 증가와 더불어 교회의 목사들의 영향력이 늘어감에 따라 희미하게 존재하던 계급의 악마적인 모습은 그 면목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그 세상적인 유혹의 문을 뿌리치지 못하는 목사들은 그들의 지위와 권세, 물질적 풍요를 자신의 대에서 누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넘겨주려는 잘못된 부성을 정당화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에게 잘못된 충성과 사랑으로 권세를 준 사람들은 그 행태를 별 거부감이나 교회의 주인 된 분에게 죄책감이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목사라는 위치는 스스로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결코 세상의 물질이나 권세, 명예, 나아가 존경도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없는 자리다. 그것은 자연히 영적인 것으로 영의 세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세상의 삶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목사가 되려 하고 고민 없이 쉽게 목사가 된다. 그 결과로 수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성도들이 그 본질을 잃어버려 방황하고 있다.

고시를 패스해 젊은 나이에 권세를 잡은 젊은이들이 나이 든 직원을 호령하듯, 재벌 2세들이 그 회사 직원들을 부리듯, 간혹 젊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권세를 등에 업고 사회적인 존경심이나 나아가 나이까지 무시해 버리는 권위를 추구하고 또 행사한다. 눈에 보이게 행할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권위를 확인, 확신하고 예수님의 길인 겸손과는 정반대의 길인 카리스마를 행사하려고도 한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개혁을 외친다. 그 내용은 별로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교회의 세상화, 그 속에 목사의 군림, 물질, 헌금의 수납 형태와 사용, 타락한 직분 자체의 의미와 그 직분을 받고 그를 사용하는 이들의 잘못된 행, 기독교인들의 기복적 사고, 고치기는커녕 이를 이용하는 교회의 운영자들, 맹종과 순종, 순종의 대상, 하나님의 미련함이 아닌 인간의 미련함으로 대처하는 세상의 지혜.

이런 모습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음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자기의 의일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어도, 이 시대에 같은 주를 섬기는 교회의 한 일원으로 안타까움이 있다.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여도 출구가 없다. 대안이 없다. 있어도 지금은 씨를 뿌려야 하는 시기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치유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씀과 같이 새로운 가슴의 사람들이 모여 다시금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을 믿는다. 그 일에 같이 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