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이야기

박재형 교수님의 아내와 함께 한 지난 10년 [존엄사에 대한 생각 4]

junihome 2010. 1. 2. 00:25

박재형 교수님은 내가 존경하는 분들 중의 한 분이다. 낙태반대운동연합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박상은 원장님의 형님이시기도 하다. 박재형 교수님은 서울대학교에서 성산생명윤리연구소를 지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와도 교류가 있었다. 박재형 교수님의 아내는 [존엄사에 대한 생각 1]의 동영상에도 나오듯이 지난 10년 간 식물인간 상태로 지냈다. 그런 아내를 포기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인가, 그런 아내를 포기하지 않은 지금까지의 삶은 무모한 것이었던가?

[신문 기사는 2009년 12월 17일자이다. 신문 기사 아래에는 경희대 박재현 교수님의 존엄사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그저 보살피는 일(Caring, but only Caring)

 

박재현(경희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교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존엄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존엄사는 의료현장의 의료인과 환자 그리고 가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또 그저 치료를 중단하는 의학적 결정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존엄사에 대한 관점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자신의 몸과 생명에 대한 인간의 권리와 책임, 건강과 질병,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 등 신앙의 본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조금 어렵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알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원 교수의 발제를 정리하고 보충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윤리적인 논란이 있을 때에 가치판단에 앞서 사실판단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존엄사’ 논쟁을 촉발한 ‘세브란스 병원 사건’에 대한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의 환자는 2008년 2월에 폐 조직 검사를 받다가 출혈로 인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흘러간 시간을 생각해보자. 2008년 2월부터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나지 않은 2009년 5월 현재까지 따지면 환자는 1년 3개월을 생존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종환자’, ‘연명치료중단’을 말하며 논의를 하는 일 자체가 논쟁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둘째, 이상원 교수도 ‘정의의 문제’에서 지적을 한 것처럼 ‘존엄사’라는 용어의 사용에 유의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논쟁의 흐름을 보면 소극적 안락사, 임종환자의 연명치료 중단, 존엄사의 순서로 용어가 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 변화에서 용어를 바꿔 씀으로써 윤리적인 부담을 덜어보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존엄사가 ‘안락사’와 명확하게 구분되는 개념인 듯 쓰고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의사조력자살’을 가능하게 한 미국 오리건주의 법률 이름이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이다. 이를 보면 ‘존엄사’가 안락사와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별도의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둘러싼 ‘존엄사’ 논란을 들 수 있다. 마치 ‘생명윤리 문제에 있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도 존엄사를 선택했으니 우리 사회도 존엄사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식으로 아전인수 격의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가톨릭주교회의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두고 사회 일각에서 ‘존엄사를 선택했다’, ‘인공호흡기만 떼어내는 전형적인 존엄사다’, ‘추기경의 죽음이 존엄사법 제정에 힘을 싣는다’는 말로 김 추기경의 죽음까지도 일부 집단의 주장과 이익에 악용당하고 있음은 매우 슬픈 일”이라며 “김 추기경의 선종은 결코 존엄사가 아니라 노환으로 인해 이제 더는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겸손하게 순응하고, 당신의 모든 삶을 온전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손에 맡기시면서 지상의 삶을 마감한 것”이라고 밝혔다. 존엄사는 안락사와 전혀 다른 별도의 개념이 아니다. 안락사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셋째, 자기결정권에 대한 오해에 주의하여야 한다. 길버트 밀랜더(Gilbert Meilander)라는 기독교 생명윤리학자는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재의 분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만약에 자기결정이 진정으로 이렇게 중요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끝내는 것을 도울 권리가 있다면 다음 문제는 “어떻게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만 이런 도움을 확실하게 제공되도록 지원할 것인지에 대한 것일까?”이다. 심한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도 삶을 의미 없다고 여기거나, 계속할만한 가치가 없는 게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 또한 자율성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율성이 이처럼 중요하다면 그들의 안락사에 대한 자율적인 요구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설사 그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그럴 것이다.

 

이런 문제는 우려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더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넷째,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어디까지인지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길버트 밀랜더(Gilbert Meilander)는 적절한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살아낼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보살핌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항상 보살피지만 절대 죽이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사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바로 그 깊은 헌신이 현대 의학 발전의 매우 강력한 동력이 되어 왔다. 우리의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는 의무는 고통 받는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대처할 수 있는 더 좋은 길을 찾는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존엄사를 합법화하여 고통 받는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길버트 밀랜더(Gilbert Meilander)의 말과 같이 ‘그저 보살피는 일(Caring, but only carin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