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의 제목은 Cimon and Pero(키몬과 페로)라고 하는 것으로 루벤스가 그린 작품인데 기원전 3세기경 로마인 발레리우스 막스무스가 쓴 <기억할 만한 공적과 격언>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노인인 키몬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갖힌 채로 음식물을 주지 말라는 형벌이 가해졌다.
결국 노인은 감옥 안에서 굶어 죽어 가고 있었고 이를 보다 못한 그의 딸 페로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출산한지 얼마 안되어 퉁퉁 부은 젖을 물리게 된다.
당국은 이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노인을 석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두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어서 이다.
첫째는 이 그림의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본다면 아마 음탕한 노인과 여인의 불순한 행각 쯤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림에서는 수갑도 채워져 있고 하여 그런 평범한 상황은 아닐 것으로 짐작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런 추측의 실마리들이 없다고 가정하면 대뜸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나서 그림을 보면 도화를 보는 기분보다는 숭고한 감정을 가지고 보게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그림이든 어떤 사건이든 그 진실을 제대로 알고 본다면 매우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을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이 그림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가치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 보자고 하는 것이다.
비록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딸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물리기까지 하였으나 여하튼 젊은 여인이 늙은이 그리고 창을 통해 들여다 보는 구경꾼 들에게 가슴을 드러내는 수치를 감수했다는 사실이다.
즉 아버지를 살리고자 하는 목적이 젖가슴을 감추어 수치스럽지 않고자 하는 목적보다 좀더 높은 가치라는 점이고 이렇게 어떤 행위로 초래되는 상황에서 어느 것에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이 옳으냐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공감대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앞의 그림을 보면서 낙태 문제를 생각해 본다.
첫번째, 진실의 문제.
낙태 문제에 있어서 여성측에서 보았을 때 진실은 무엇일까?
낙태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여성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낙태를 하게 하는 것이 여성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림에서는 쉽게 진실을 알 수 있었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개개인이 처한 상황마다 다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 지기 때문에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직 모른다.
낙태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출산을 피해가기 위해 그럭저럭 감수할만한 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출산을 피해 택했다가 오히려 더 끔찍한 후유증을 겪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즉 그림의 경우와 비교를 한다면 노인이 죽지 않기 위해 딸의 젖을 먹는 것인지 쾌락을 위해 여체를 탐하는 것인지 모르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낙태 문제에 있어 누구는 전자가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누구는 후자가 진실이라고 주장을 한다.
여하튼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 진실은 저절로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진실은 낙태로 인해 개개 여성이 겪는 인생의 행로와 낙태를 하지 않음으로써 겪는 인생의 행로를 솔직하고도 광범위하게 비교해 보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지난 세월을 반추해서 낙태를 제한없이 하게 된 상황에서 여성의 권익이 증진되었는지 감소되었는지 보는 방법을 통하거나 아니면 앞으로 그런 상황이 올 지 모르겠으나 낙태가 강하게 억압되었을 때 여성의 권익이 감소하는 지 혹은 증진하는 지 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가치의 문제.
낙태 문제에 있어서는 태아의 생명의 문제와 여성의 행복 추구라는 가치의 문제가 충돌하고 있다.
태아의 생명에 관하여는 태어난 사람의 생명이 지닌 가치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라고 하는 인간의 생명의 가치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이다.
여성의 행복 추구의 문제는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심각한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부터 사회적인 안녕과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안락함을 보존하려는 욕망, 그리고 자녀의 터울 조절과 같은 매우 사소한 개인적 사유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것이다.
태아의 경우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인 것은 틀림이 없고 태어난 인간의 생명의 가치보다는 다소 낮게 평가하는 그룹이 있으므로 그 경우와 여성이 얻는 가치를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여성의 생명 포기 상황과 태아의 생명 유지 중 어느 것을 택할지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사실 간단치 않은 문제이며 전적으로 개인의 결정에 맡기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악성 암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치료를 포기하고 태아를 위해 출산을 택한 여성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출산을 포기한 여성도 존재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어느 정도의 사회적인 혹은 경제적인 안락함의 보존과 태아의 생명의 가치와의 비교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점에서는 현재는 다수 사람들은 비록 태어난 성인과 같다고 볼 수는 없다고 양보하더라도 태아의 생명의 가치가 우선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것이라도 생명의 가치는 가장 큰 사회 경제적 가치보다 크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생각이 더 보편적 가치로 유지될 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터울 조절과 같은 매우 사소해 보이는 개인적 이유의 경우와 태아의 생명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이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가치의 측면에서는 임신한 여성의 생명이 위협되는 경우 외에는 어떤 경우라도 비록 성인의 생명과 완전히 똑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태아의 가치가 다른 것에 비하여 더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문제는 이런 가치관은 시대적인 흐름이나 정치 경제적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쪽으로 인간 사회가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느 쪽이 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세상 살이는 매우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림에서 나온 사례의 경우에 견준다면 어디에 가치관을 두느냐에 따라,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따라 노인과 젊은 여성이 패륜 인간들로 매도되어 둘다 감옥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거나 아니면 숭고한 모범 사례로 두고 두고 추앙 받는 것이다.
역사에서는 둘다 목숨을 부지하고 널리 추앙받는 모녀 지간으로 남았다.
그러나 앞으로 그렇게 모든 경우에서 반드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결과가 나오게 될 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 여부는 우리가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 기울이느냐 하는 점과 어느 가치를 우선할 것이냐 하는 점에 달렸을 것이다.
그저 바라는게 있다면 세상이 정말 팍팍하고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심지어는 자신의 태아마저도 희생시키는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대개의 경우 생명의 가치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것이라는 가치가 존속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태아의 생명이든 가난한 자의 생명이든 혹은 장애를 가진 사람의 생명이든 차별없이 말이다.
내가 이런 바램을 가지는 이유는 다른 사람도 그리 다르지 않겠지만 인간 세상에서 살인이 없어지지 않고 폭력이 소멸하지 않더라도 살인과 폭력은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 우리 모두 가슴 깊이 새기고 노력하는 한 살인과 폭력은 늘기 보다는 줄어 들 것이고 그런 생각이 보편적 상식으로 통하는 한 살인과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보다는 그 피해자들이 더 보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더 보호되는 것이 전체 인류의 행복에 있어 득일 것이라고 믿는다.
2010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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