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덕
2010년 8월 2일
나는 젊은 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상당히 긴 동안 혼란스러웠다.
아시겠지만 죄와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리대금없자인 어느 노파를 죽이고 그녀가 가진 돈을 빼앗아 사회에 좀더 긍정적 기여를 할 젊은이들이 배움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완전 범죄로 꾸며 법적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소냐라고 하는 여인을 만나 종교적 구원을 찾으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벌을 받는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동안 나는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의 행동에 심정적으로 많이 공감을 했었으며 주인공이 종교적 차원에서의 죄의식을 느끼고 벌을 택하는 것을 보면서 소설가가 상당히 작위적인 결말을 지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이후 나는 의사로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을 택하면서 분명한 나름대로의 철학을 다듬을 수 있었다.
비록 종교적 차원에서 살인에 대하여 죄와벌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없지만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하여 누구도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은 죄와벌의 결론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소위 사회 경제적 이유에 의한 낙태를 대폭 허용해 주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여성이 또는 한 가정이나 국가가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 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것은 권장할 일이며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음으로써 얻는 것이라면 우리 인간은 절대 그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비록 살아 있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보이는 노파를 죽여 다른 좀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회 경제적 발전을 이룬다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낙태를 통하여 한 사회가 혹은 한 인간이 막대한 경제적 발전을 이룬다 한들, 혹은 훨씬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된다 한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물론 태아의 경우 그렇게 지고의 가치로 보장해 주어야 하는 생명으로 볼 것이냐 하는 점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의사로서 특히 생명의 잉태와 출산과 그 모든 과정을 아주 가까운 지근 거리에서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온 산부인과 의사로서 나는 산모의 뱃속에 들어 있는 그 존재는 태아라고 이름을 붙이던 무어라고 이름을 붙이던 생명체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회 경제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법적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의학적 관점에서 태아는 분명히 살아 있는 인간이다.
생명체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이제는 태아를 포함하여 어떤 처지의 인간이든지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가 기울일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함께 기울이자고 호소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여 얻은 돈으로 어떤 대단한 것을 얻더라도 노파를 죽이지 않는 것 이상의 가치는 없다.
노파가 아무리 쓸모 없고 사회에 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의 생명은 온전히 그의 것이다.
태아가 미약하여 스스로 말을 하여 주장하지 못하고 내 자신의 이득을 위해 희생해도 되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생명은 온전히 그의 것이다.
나의 생명이 온전히 내 것이고 그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심상덕 컬럼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태 현실에서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0) | 2010.08.08 |
---|---|
미혼모에 대한 지원 관련 추천 기사 (0) | 2010.08.08 |
낙태 필요성에 대한 주장의 역사적 변화를 보면서 (0) | 2010.08.05 |
낙태 하는 것 vs. 낙태 하지 않는 것, 각각 그것들이 가져다 주는 이득은? (0) | 2010.08.04 |
과거와 현재의 모습, 얼마나 다를까? (0) | 2010.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