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덕
2010년 10월 17일
위 제목에 적은 말은 낙태의 문제점을 알리고자 제가 자의적으로 만들어 본 문장인데, 번역하자면 낙태는 우리의 무감각증을 증폭시킬 위험이 있는 무서운 폭탄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영어로 낙태인 Abortion의 철자를 첫자로 하는 단어로 만들어 본 것이다.
우리 몸에는 많은 통증 세포들이 신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이런 통증 세포들의 역할은 개체를 위협하는 외부의 자극, 이를테면 뜨거운 것이나 아주 차가운 것 혹은 날카로운 물건에 의해 신체가 손상을 입었을 때 즉각 반응하여 더 이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손상 받은 곳을 빨리 찾아서 복구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런 불쾌한 감각을 기억케 하여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사전에 주의하게 하는 작용도 있다.
즉 개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통증 자체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것이지만 그 존재는 생명체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기 그지 없다.
육체적 관점에서 통증처럼 우리의 정신에도 그런 파수꾼 혹은 바로미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있는데 소위 양심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때로 이성이나 초자아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본능에 의해 혹은 이기적인 생각으로 인해 옳지 못한 길을 가려고 할 때 억제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생각하면 통증 감각처럼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통증 감각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양심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통증 감각도 그렇지만 양심이나 이성도 상황에 따라 마비되는 경우가 있다.
낙태는 인간 본연의 의무인 타인의 생명 존중이라는 윤리 의식의 부재나 혹은 아기를 건강하게 낳아서 키워야 하는 부모와 사회의 책임을 포기한 무책임으로 말마암아 초래된 일이다.
문제는 그런 행동이 결과적으로 비윤리와 무책임감을 점점 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를 처음 할 때는 초기 낙태조차도 심적 부담이 적지 않지만 반복해서 하다 보면 중기 이후로 이미 다 발육된 태아의 낙태 조차도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또 시기 불문하고 낙태 시술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게 된다.
나는 이것을 낙태에 관한 악순환이라고 부르고 싶다,
통증 감각이 괴롭다고 해서 원인적 해결에 나서지 않고 그저 그 경고를 외면해 버리는 개체는 그 댓가를 반드시 치루게 되는 것처럼 낙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는 세상도 반드시 그 댓가를 치루게 되어 있다.
자신의 아기를 보호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최소한의 윤리마저 무참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허물어지는데 어찌 완전히 남남인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고 배려 하는 마음이 생길수가 있겠는가?
아마도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세상, 가진 것의 다소나 처한 상황의 고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마음 놓고 안전하게 사는 세상은 없을 것이다. (이미 상당 부분 그렇게 되고 있지만)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이제라도 인간성은 상실된 채 그저 경쟁과 파괴만이 넘쳐 흐르는 삭막한 세상에서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그런 악순환을 중단하는데 발벗고 나서야 한다.
그렇게 발벗고 나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리고 적극적일수록 악순환은 빨리 중단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태아든 가난한 자이든 장애아이든 사회적 약자이든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게 되는 길로 접어 들었다는 뜻이다.
즉 건강한 사회로의 회복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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