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에 대한 살인은 이유 불문하고 모든 사회에서 금지하고 있다.
물론 아주 원시 시대에는 그런 규정이 없어서 타 부족 혹은 원수를 갚기 위하여 살인이 용납되기도 하였으며 노예나 종의 생사 여탈권을 주인이 가지고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런 문화는 지금도 일부 남아서 전쟁 중에 혹은 사형 집행을 통하여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성인에 대한 살인은 금지되어 있다.
어린이에 대한 살인도 금지되어 있지만 얼마전인 중세까지도 서양에서는 어린이는 인권이라는 것이 없이 부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태아에 대하여는 의학적 도움없이도 생존이 가능한 7개월 내지 8개월 이후의 태아에 대하여 대부분 국가에서 낙태가 금지되어 있다.
물론 이도 예외적으로 허용해 두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의학적 도움이 가해지면 생존이 가능한 5개월 이후의 태아에 대하여는 국가마다 사유에 따라 허용을 하는 나라와 불허하는 나라로 갈려있다.
의학적 도움으로도 생존이 어렵다고 판단하는 5개월 이전의 초중기 낙태의 경우 역시 사유에 따라 다르지만 많은 국가에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그리고 소위 사후 피임약이나 루프를 이용한 수정란의 낙태 혹은 수정되기 전의 난자나 정자의 폐기는 대부분 국가에서 허용되고 있다.
이렇게 성인에 대한 살인-->유아에 대한 살인-->태아에 대한 낙태-->수정란에 대한 낙태-->난자나 정자의 폐기에 이르기까지 생명은 연속된 스펙트럼 속에 있으면서 국가 사회 차원의 개입 정도는 제 각각인 처지이다.
이즈음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어느 지점에서 국가 혹은 전체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냐 하는 것과 어느 지점의 개입이 실질적으로 가능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성인이나 유아에 대한 살인은 대부분 시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확인이 용이하고 억지에 대하여 윤리적 저항감이 적어서 사회 차원에서 적발과 억지력 발휘가 비교적 쉽지만 발생하는 사유가 상당히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에 살해 동기가 발생한 상태에서 개인 차원에서의 자발적 억지는 쉽지 않다. (즉 장난 삼아 살인하기로 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의 경우 매우 심한 원한 관계나 극심한 경제적 궁핍에서 살인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낙태에 대한 것은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증거물이 없어서 사회적 차원의 확인이 쉽지 않고 억지력 발휘도 대개는 약한 편이지만 살인보다는 개인 차원의 억지가 조금 쉬운 편이다. (즉 어느 개인에게 있어서 살인을 포기하기보다는 낙태를 포기하는 것이 쉽다는 의미이다.)
수정란에 대한 낙태나 난자, 정자 폐기기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적발은 거의 불가능하며 억지도 거의 불가능하지만 개인 차원에서 조금만 마음을 먹으면 다른 방법을 구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그렇다면 살인부터 난자 정자의 폐기까지 어느 수준에서 사회적 개입을 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일 것인가?
그것에 대하여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개입 지점은 살인과 낙태 사이, 또는 낙태와 수정란 폐기 사이, 아니면 초기 낙태와 중기 낙태 사이에 두는 것 중에 택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임신 2개월과 5개월 혹은 8개월 사이에 선을 긋는데 따르는 모순을 감안하고 난자와 정자의 폐기가 실질적으로 사회적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결국 살인과 낙태 사이에 두거나 낙태와 수정란 폐기 사이에 두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비교적 최근까지의 과거에는 사회의 개입 지점을 살인과 낙태 사이에 두었다. 즉 살인은 억지하지만 낙태는 억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현재는 초기 낙태와 중기 낙태 사이에 그 기준점을 두고 있는 국가가 많지만 이는 의학적으로는 매우 불합리한 규정이며 의학의 발달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의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수정란과 난자 정자의 폐기 사이에 개입 지점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수정란과 난자나 정자의 폐기 사이에 두기에는 적발의 어려움이 매우 크고 따라서 실질적 억지력을 발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면서 오히려 억지력 기준 자체만 무력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즉 개인적으로 수정란 폐기를 하지 않도록 설득할 수는 있지만 사후 피임약이나 루프의 사용까지 사회가 금지할 수는 없는 형편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다소간의 논리적 모순이 없지 않지만 낙태와 수정란 사이에 그 기준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개인적 생각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인간은 그 잉태된 순간부터 존중하겠노라 하는 선서가 있다.
그가 말한 잉태를 수정된 순간으로 볼 것인지 착상된 순간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생물학적으로는 수정된 순간부터 생명으로 봄이 타당하지만 어느 순간에 수정이 되었는지 대부분의 경우 의학적 확인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의학적 확인이 가능한 착상 순간부터 적극적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생명 윤리적으로 봐서 타당한 것이라기 보다 의료 현장에 있는 실무자인 의학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내 견해가 그렇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생명 윤리와 별개로 살인보다는 낙태가 낫고 말기 낙태보다는 초기 낙태가 낫다는 점에서 착상과 수정 사이를 개입 지점으로 보자는 것이며 엄밀히 따지면 초기 낙태나 말기 낙태나 준 살인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지만 의학적 견지에서는 여성에게는 그 둘은 매우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수정란 폐기와 착상 태아의 낙태도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 사회가 어느 지점을 적극 개입 지점으로 정할지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야 하겠지만 나는 착상 순간부터의 낙태는 산모 생명 구명 차원 이외에는 금지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물론 사회적 개입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개인적 선택이 일체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요가 있는 한 어디선가는 공급이 발생하는 것이 세상이치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지향점에 대하여는 우리 사회가 방향을 정해 놓고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개입 지점을 실질적으로 가능한 지점에서 그리고 생명 윤리를 많이 훼손하지 않는 부분에다 두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개인적으로 착상된 이후의 낙태를 필요악이라 생각하고 원하는 사람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일단 착상된 태아에 대하여 낙태는 국가와 사회 전체를 위해서 해로우므로 피하자고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낙태는 여성과 태아 자신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행이므로 피해가야 할 것으로 방향을 정하고 근절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기를 바란다.
현실이 어떠하니까 그에 맞추어서 이상을 끌어 내리는 것보다는 이상에 맞추어 현실을 개선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좀더 인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2010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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