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이야기/교회 이야기

[스크랩] 영화 `회복`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junihome 2010. 3. 31. 18:33


1.

'예수를 믿는 유대인'을 일컬어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라고 한다. 


이스라엘로 직접 찾아가서 이들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회복(Restoration)'은 한국인의 시각으로 이 주제를 다룬 매우 특별한 다큐멘터리임에 틀림없다.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두고 열린 2010년 1월 11일 저녁의 시사회는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3개관을 대관해 동시에 진행하였는데, 애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1,200여명이 시사회에 참여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아마도 시사회에 이토록 대규모의 인원이 모인 사실과 다큐멘터리 자체의 임팩트를 생각할 때 앞으로 상당한 정도의 관객동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예상된다. 


2.
매우 평범해 보이는 한 유대인 가정에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초콜렛 선물이 배달된다. 무심코 이를 열어본 아미 오르티즈(당시 16세)는 거기 담긴 폭탄이 폭발하면서 전신에 걸쳐 끔찍한 부상을 당한다. 누가 이런 잔인한 짓을 한 것인가? 

이 작품은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메시아닉 쥬에게 벌어질 수 있는 한 사건임을 보여준다. 정통파 유대인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테러사건에서부터 이 작품은 박진감 넘치게 시작한다. 이스라엘 현지를 폭넓게 누비고 다닌 촬영은 스케일이 크고, 군더더기 없이 핵심적 장면을 잘 포착해내었다. 메시아닉 쥬들의 생생한 육성과 현실을 담아내었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폭행과 폭언을 일삼는 정통파 유대인들의 언행도 직접 전달해주어서 관객들은 마치 현장에서 이런 상황을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여러 곳의 기독교 예배 처소와 사역자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고, 길거리에서 과감하게 전도하는 모습, 기독교를 믿게된 유대인 회심자들의 간증, 메시아닉 쥬들의 예배 모습 등을 보여준다. 동시에 유대교 랍비와의 인터뷰, 회당의 예배 장면, 정통파 유대인들의 시위나 예배 훼방 행동들, 반기독교 단체 관계자와의 인터뷰 등 흔히 접하기 힘든 모습을 공들여 찍은 영상으로 전달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스라엘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단지 토막소식의 외신으로만 들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손에 잡힐 듯 현실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 <회복> 사이트 www.restorationthemovie.com 자료화면



3.
95분 러닝타임 동안 우리는 정통파 유대인 그룹들의 일방적인 박해 현장을 여러번 지켜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의외로 얻는 소득이 많다. 

첫째, 그들이 기독교를 반대할 때마다 등장하는 '기독교인이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단순한 이론이나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강력하게 살아 움직이는 실체란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나찌의 유대인 학살(Holocoast),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십자군 전쟁(the Crusade), 그리고 더 올라가 신약교회의 공인 초기에 벌어진 유대인 학살을 포함하는 반유대주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지목하는 그들을 보면서 오늘날 기독교가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무엇보다도 2,000년에 걸쳐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반대유대주의'를 청산하는 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둘째, 우리가 당연시 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고백이 그리 쉽게 수용할만한 것이 아니란 점을 일깨운다. '어떻게 사람을 신으로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기적을 행하거나, 죽었다 살아난다고 다 메시야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메시야는 여러 명 있었다',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지금 나의 죄를 사해준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가?' 등 그들의 질문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단지 구약과 신약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나 정통파 유대인들에게는 기독교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인함으로써만 성립가능한 종교'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함께 영화를 본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세계관적 전환을 요구하는 일인지 이해가 된다고 하였다. 이 영화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제대로 된 변증의 필요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셋째, '선교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정통파 유대인들로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데, 더구나 기독교는 2,000년에 걸친 유대인 학살의 정당화 논리를 제공한 종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기독교인들이 오랜 디아스포라 생활을 청산하고 이스라엘로 귀환해 살고 있는 유대인의 땅에서 바로 그 기독교를 믿으라고 활동하고 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정통파 유대인 그룹들의 현실인식이다. 그러하기에 이들은 적극적인 예배 방해, 선교사에 대한 말과 행동의 위협, 전도행위 차단, 나아가서는 선교사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테러까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선교'란 무엇이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은 관객들 머리와 가슴에 핵심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최근 몇년간 한국 기독교가 세계선교와 관련하여 겪은 이라크 김선일 사건과 아프간 피납사건 등은 유대인 이상으로 기독교와 악연을 맺어온 이슬람권을 향한 것이었으니, '선교'에 대한 질문이 한층 뼈저리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선교는 어떤 것일까 두번 세번 되새겨 묻게 된다.

이 영화는 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영상으로 이런 질문들을 긴급하게 우리들에게 제기하는데에 성공한 작품이다. 우리가 물어봐야 할 질문을 아프게, 그리고 끈질기게 묻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존재감은 크게 다가간다. 영화가 굳이 급하게 답을 보여주지 않고 아직 타문화와 타종교에 대한 공부가 일천한 한국교회가 점차 그 빈칸을 채워나가도록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더라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4.
그러나, 이 영화는 성급하게 결론을 향해 휘몰아가느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당한 수준의 영화적-신앙적 기여를 역설적으로 허물어뜨리고 있다. 직설적인 나래이션과 음악을 과도할 정도로 사용하고 있는 데에서 명료하게 드러나는 바, 영화의 신학적-실천적 결론은 지나치게 협소한 '선교적 선동'에 동원되고 있다. 이 영화가 정작 말하고 있는 것보다, 말하고 있지 않은 것에 주목함으로써 훨씬 이스라엘의 회복에 깊게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까지 하다. 
  
첫째, 이 영화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제로 삼고 있지만, 사실상 이스라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을 누락시키고 있다. 영화의 초반 내래이션에서도 언급되다시피, 이스라엘에는 약 500만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고, 그중 10%가 정통파 유대인들로 분류될 수 있다고 했다. '메시아닉 쥬'들은 1만4천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영화의 기본적 갈등구조는 '메시아닉 쥬' 대 '정통파 유대인들'이다. 폭탄테러를 가하거나, 폭행을 하거나, 욕설을 퍼붓는 이들은 과격파 유대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그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90%의 유대인들은 어떤 이들일까? 어느 사회나 그렇듯, 유대교나 이슬람이나 과격파와 열심당들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온건하거나, 혹은 흔히 말하듯 '세속화' 되었거나, '자유주의적(liberal)'인 경우에 해당한다. 

유대교의 경우에도 신앙적 열심이 과도한 정통파도 있지만, 명목상의 유대인들이나 문화적 의미에서의 유대인도 적지 않다. 유대인들 모두가 시오니즘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서구 사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꽤 많다.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러시아를 비롯해서 동구 유럽 등 가난하고 힘든 상황에서 살다가 귀환한 경우들이 상당수이다. 현지에 잘 정착한 유복한 유대인들의 경우는 왠만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이스라엘로 이주하기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 상황에서 실제 갈등구조는 90%의 유대인들에 대한 종교적 영향력을 놓고, 10%의 정통파들과 1만4천명의 메시아닉 쥬들이 서로 사회적 정당성을 얻고자 노력하는 구도로 파악하는 것이 더 현실에 맞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는 이 90%의 유대인들과 관련한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긴장과 갈등의 현실이 거기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갈등의 양 당사자간에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지켜보는 90%를 향해 누가 더 합당한 진리 증거를 하느냐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영화 후반에 나오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례의 당사자들만 보아도 그들은 분명 정통파 유대인 그룹이었다가 이탈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다 기적적인 신앙체험을 한 이들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10%의 정통파들과의 영적대결 전선이 아니라, 어떻게 90%의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고, 기독교가 오해받지 않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할 것인가와 더 밀접하게 연관된다. 

둘째,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바람직한 증거의 방식은 무엇인가 물어야 할 것이다. 역시 보여주고 있는 것보다 보여지지 않은 대안들을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닉 쥬들이 할 수 있는 선택과 한국 기독교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다르다는 사실을 한번 더 상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는 상당한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로변에서 플래카드를 들거나, 길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유대인들을 보여주었다. 아마 가택연금, 위치추적 등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종류의 '돌파'가 필요한 상황이고, 그것 외에 달리 선택할 여지가 많지 않을 것이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만으로도 생명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과감하게 불이익을 감수하는 그들의 선택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결하게 담금질하는 한편,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부끄러움을 유발하고, 심정적 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기독교인들이라면 (혹은 어느 사회든 소수자(minority)들이 겪는 유사한 어려움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한 요청이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이 곧 우리의 대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에게 가능한 대안을 선택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왔던 바, 정통파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이방종교라고 비난할 때 메시아닉 쥬들은 "우리도 유대인이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선교사의 경우라면 "이방 기독교도들의 유대인 전통 훼손"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바울이 말했던 바 "동족을 위해서는 내가 생명책에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같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메시지가 자칫 잘못 읽혀서 이스라엘이나 이슬람권에서 '이방인의 분별없는 도발'이 될 행동이 현지에서 필요한 '전략적 선교 행위'로 동일시 되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한국 기독교가 선교현지에서 종종 비판받는 것이 이 지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장기 선교사가 현지인들의 관습을 익히고, 그들의 마음을 얻기까지 수십년을 필요로 하는데, 훌쩍 두어주 단기선교 들어온 팀들이 "이 나라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휘젓고 나가는 것은 단지 선교 활동의 문제 이전에 타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보란듯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셋째, 영화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안인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 영화의 결론처럼 '예루살렘의 평화'로 해결될 것인가 묻게 된다. 메시아닉 쥬의 등장이 말세의 이스라엘 회복의 징표이며, 이것이 성경적 예언의 성취라는 결론부의 내용은 매우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전형적인 한 형태인데,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스라엘이란 근대국가의 형성과 동일시하는 유대 시오니즘(Zionism)에 더 가깝지, 기독교적 성경 이해와 전적으로 합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선교계에서 얼마전까지 회자되던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이란 슬로건으로 집약되는 이 입장은 여러 면에서 약점이 있다. 물론 기독교계에서는 이런 이해/오해가 상당한 정도로 확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선교의 필요성을 이런 논리에 의존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언제든지 예루살렘에 제3의 성전을 세우고, 메시야가 도래함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이 직접 이루어지는 방식의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는 시오니즘을 떠올린다. 세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은 그런 유대교적 전망에 일차적으로 동의하면서, 결국 그렇게 유대인의 귀환과 회복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 이스라엘이 복음화 되는 것으로 종말의 도래를 그려보고 있다. 결국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의 나라가 형성되는 일에는 피차에 종말론적 동의가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수백년을 멀쩡히 이곳에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그 땅에서 쫓아내는 일에는 정통파 유대인들만 아니라 세대주의 기독교인들도 심정적 공감을 해 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상황을 무어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테마는 종종 종말론과 섞이면서 '예루살렘/시온의 기독교화'로 나타나곤 했는데, 중세의 십자군 원정이 바로 그 논리 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 역시 그런 논리의 연장선 상에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팔레스타인 이슈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겠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평화에 가장 핵심적 사안이 되어 있는 유대-팔레스타인 문제가 영화의 결론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위태해 보였다고 말하는 것이 좀더 정직할 것 같다. '마음의 진정성'이 충돌하는 종교적 분쟁의 현장에서는 단지 '진정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랜 역사의 분쟁을 들여다보면서 좀더 찬찬히 맥락을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직선'으로 피아와 선악을 갈라놓을 수 없는 현장 위에다 '보기 좋게' 선을 긋는 것은 당사자를 위해서도, 관찰자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한편의 영화가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메시아닉 쥬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 해야 하는 것의 전부를 전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가 잘 말해준 것을 최대치로 환영하고, 축하하자. 그러나, 영화가 미처 다 보여주지 못했던 것들, 그 맥락을 더듬고자 의욕을 일으키는 촉매의 역할로 이 영화가 자리매김 되었으면 좋겠다.  
 

영화 '회복' 중간 중간에 나와서 은혜를 더해주던 그 음악...

 
출처 : 삶의 의미를 찾아서
글쓴이 : 억스 원글보기
메모 : 영화 회복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