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8일
아침부터 기분이 개운치는 않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으니 먹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런데 처조카 식당 개업 축하하러 갔는데 어떻게 안 먹을 수가 있었겠나. 그러나 먹어서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거의 매일 쉬지 않고 일정이 있었던 최근의 상황이 스트레스를 누적시켜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집에 들어온 직후부터 경련이 시작되어서 다행이지 만일 그날 따라 하루 종일 운전했었는데 길에서 그랬다면 더 큰일이 날 뻔했다.
아랫배가 아니라 윗배가 딱딱해지며 뻐근한 느낌이 오는 것이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점점 통증도 심해지고 통증이 오는 주기도 빨라졌다. 곧 구토와 오한이 났다. 2003년 우즈베키스탄에 전도여행 갔다가 도착한 첫 날 밤 토사곽난으로 사경을 헤맸던 기억이 났다. 참아볼까, 참아볼까 하다가 갈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심해지는 것을 보면서 진경제(위 꼬이는 경직을 풀어주는 약)를 투약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이대목동병원 응급실을 가려고 일어서 보았지만 몸을 펼 수가 없고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다. 운전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119를 부를까 하다가 동네 시끄럽게 할까 봐 교인 119를 불렀다. 야심한지라 바로 옆집 교인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윤창선 형제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이대목동병원 응급실에 들어가니 종합검진이 시작되었다. 절차이니 어찌하랴. 그런데 최유경 자매가 오늘 마침 응급실 당직의사였다. 유경이의 특진을 받은 셈이다. 2시간 후에 통증이 가라앉아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이틀을 꼼짝하지 않고 집에서 보냈다. 왜냐하면 21일 낙태반대운동연합 창립 15주년 기념식이 있고 거기서 내가 맡은 일이 많기 때문에 몸을 제대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위는 쾌차해졌다. 그런데 그날 얼마나 근육경직이 일어났었는지 뱃가죽과 허리 주변이 아직도 뻐근하다.
누구나 이 정도 아픈 일은 수시로 겪는데 왜 이렇게 길게 적느냐?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너무 편히 살았다. 별로 아픈 적이 없었다. 병원 가운을 입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번에도 입지 못하고 퇴원했지만. 그렇게 바쁜 일정으로 체력소모가 큰 교회 담임목회를 했던 시절에도 하루 길이의 감기를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스쳐지나간 것이 아픈 것의 전부였으니까 조금은 심한 편이다. 그래서 한 번 아프면 그것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자주 아플 것이고 그것에 적응하는 게 노년다운 태도일 것이다. 병과 싸우려 하지는 말아야지. 병은 자연스러움이니까.
'나의 이야기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1125 아내 생일 (0) | 2009.11.25 |
---|---|
20091122 오십오 년 만의 일요일 나들이 (0) | 2009.11.25 |
20091101 고별연설 (0) | 2009.11.06 |
20091101 고별연설 원고 (0) | 2009.11.06 |
목산교회와 함께 한 22년 회고 (0) | 2009.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