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
심상덕
2011년 10월 28일
어제 한국 여성 민우회에서 주관하는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 토론회를 다녀왔습니다.
초청받아 간 것은 아니지만 여러 토론자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낙태 문제에 대하여 프로라이프 쪽의 의견이든 프로초이스쪽의 의견이든 관심을 가진 여성들이 예상 밖으로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나마라도 여성단체에서 낙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여성의 인권 차원에서라도 고민을 하고 해결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습니다.
다만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라는 타이틀에서 당신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프로라이프 쪽의 생각을 가진 분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 분들의 주장대로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처럼 낙태 억제 쪽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주장하는 낙태든 아니면 낙태를 대폭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단체 분들이 생각하는 낙태든 다 낙태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이런저런 주장을 들으면서 여성 당사자가 그리고 사회가 낙태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낙태는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처럼 무슨 생각이나 이념이 아니라 언젠가 나한테도 닥칠 수 있는 어떤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낙태라는 용어에 대하여 임신 중지니 혹은 임신 종결이니 하는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낙태에 대하여 용어를 무엇으로 붙이던 낙태라는 것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돌덩어리"라고 이름 붙인 어떤 것을 "솜사탕" 이라고 부르던 또는 "밀가루 반죽"이라고 이름 붙이던 그것에 머리를 맞으면 치명적이 될 수 있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임신 중지라는 단어로 하여 현재 낙태를 받아야 하는 여성, 과거 낙태를 받았던 여성들의 마음의 고통(그분들은 사회적 고통이라 하더군요)은 덜어줄 수 있겠지만 장차 낙태의 위기에 놓인 여성들에게는 낙태를 피해갈 기회를 그만큼 줄어들게 만들까봐 걱정입니다.
저는 종교인이 아니며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주위에서들 말합니다.
윤리학자는 커녕 그리 윤리적으로 살아온 사람도 아닙니다. 학창 시절에 도덕 시간이 제일 지겨웠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저는 산부인과 의사 생활 20여년간 대부분의 기간을 낙태를 하는 의사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낙태를 하면서 살아온 의사입니다.
제가 오랜 기간 낙태를 해왔다고 자인했음에도 아직 붙들려가지 않을 정도로 낙태를 하는 것에 대하여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낙태를 하고 난 피덩어리의 조직물을 보면서 살인을 했다는 느낌이나 생명을 말살했다는 죄책감이 드는 편도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여성의 몸 속에 있는 종양을 제거했을 때 나오는 적출물을 보는 것과 그리 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낙태 시술을 하고 나서 여성들의 얼굴을 보면서 즐겁지도 뿌듯하지도 않았습니다.
돈도 벌 수 있고 여성들이 원하는 일을 도와주었는데 왜 힘든 분만을 하고 나서처럼 즐겁고 기쁘지가 않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께서 보고 있다는 마음도 없고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을 했다는 죄책감도 거의 없는데 왜 마음이 불편했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는 낙태 시술을 중단했고 다른 동료 의사분들도 중단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낙태를 원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비난을 듣고 있고 여성단체로부터는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는 사람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여성 다수에게 욕을 먹고 있음에도 지금은 그리 기분이 나쁘지가 않습니다.
정확하게는 그 분들에게 좀 덜 미안합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낙태가 법으로 대폭 허용되든 아니면 더 엄격히 금지되든, 또는 낙태를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게 되든 모든 여성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저와 같이 낙태를 했던 그리고 낙태를 하는 의사를 진료실에서 만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법과 윤리와 종교와 그 명칭에 관계없이 그런 일로 저와 같은 의사를 만나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피임이든 출산 양육 환경의 개선이든 어떤 점에서라도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낙태는 생각 속에 있는 개념이 아니고 현실에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