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이야기
눈에 보일 때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 윤리의 이중잣대
junihome
2011. 5. 27. 17:08

아름다운 사람 6월호에 실린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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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일 때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 윤리의 이중잣대 -
김현철
낙태반대운동연합 회장
지난 4월에 우리나라 의료기술의 발달을 보여주는 기쁜 소식이 연이어 기사화되었습니다. 임신 25주에 출산한 380g 초극소미숙아가 건강하게 자라서 퇴원했다는 소식과 우리나라 최단 임신기간 출산 기록인 22주 530g의 아기도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퇴원했다는 소식입니다. 현실에서 그럴 리는 없지만, 만일 22주에 조산한 아기가 장애인이 될 우려가 있거나 키우는 비용이 워낙 부담이 되어서 부모와 의사가 합의해서 조산아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 어떤 벌이 가해질까요? 형법의 살인죄(과실치사가 아님)가 적용되어서 구속되고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임신주수의 아기를 유도분만으로 낙태한 의사나 부모에 대해서는 어떤 벌이 주어집니까?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적발된 적도 없고, 따라서 처벌된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죽이면 안 되고, 죽여도 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인간의 초라한 도덕성’입니다. 눈에 보이면 못 죽이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개인의 편의를 위해서 죽이기도 합니다.
“장애아, 또는 기형아가 예상이 되어서 낙태를 하고 싶어요.”라고 낙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아기 본인이나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낙태를 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현재 눈에 보이는 장애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장애인들은 모두 불행한 사람들일까요? 똑같은 논리라면 사회의 불편요소인 장애인을 제거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장애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인은 제거하는 것이 합당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것, 쉽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은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곧 불행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불편요소를 제거하면 세상은 행복해질까요? 고통이나 불편은 인간 존재의 한 요소로서 항상 있을 것입니다. 고통이 있기에 기쁨도 아는 것이고, 불편이 있기에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상대적 불편요소’를 제거하는 식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면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것이며, 나는 그 누군가에게는 불편요소로 판단되어 제거대상이 될 것입니다.
다운증후군 성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제8요일’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시청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서도 어떤 사람은 다운증후군 아기는 낙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상황이 눈에 보일 때와 상황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윤리적 판단을 달리 하는 이중잣대가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