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덕 컬럼 2

살아 있는 자들이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하는 것에 대하여

junihome 2010. 11. 11. 02:00

심상덕

2010년 11월 10일

 

낙태 근절 운동으로 혹은 낙태 합법화 운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낙태 근절 운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인 저출산 문제에 대히여 다소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낙태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서 나라의 격이 높아지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분만하는 산부인과에는 늘어난 출산율로 하여 수입에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불법이고 비윤리적인 낙태 수술로 인하여 추락된 산부인과의 위상을 높여주게 될 것이다.
낙태의 위기에 몰렸던 여성으로 하여금은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여성의 건강이 침해 받는 일도 줄어들 것임에 틀림이 없다.

반대로 낙태 합법화 운동으로 얻는 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으로 하여금 힘든 출산을 하지 않아도 되니 출산과 양육의 무거운 짐을 덜게 되는 효과가 있다.
소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확보함으로써 여성의 인권이 개선된다는 점도 있다.
계속해서 학업을 이어가거나 직장에서의 불이익을 면함으로으로써 자아 실현에 도움이 되기도 할 것이다.
미혼모라는 딱지를 붙이고 손가락질을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장애아로 태어나 험난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입양을 보내야 하는 산모의 괴로움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다른 것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저출산 문제만 하더라도 항상 빨간 딱지처럼 낙태 근절을 외치는 우리에게 불순한 의도라고 따라다니고 있지만   저출산은 낙태 근절이 아니라 출산 장려책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가 있으며 그래야 한다.
국격을 높이는 데 있어서도 낙태 근절 말고도 더 좋은 다른 방법들도 많이 있다.
출산과 양육의 무거운 짐은 낙태를 통하지 않고도 피해 갈 수 있어야 마땅한 일이며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인권은 낙태권을 통하기보다는 직장과 사회에서의 양성 평등과 제도적 마련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장애아나 미혼모로 살아야 하는 고통을 더는 일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낙태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낙태 반대나 찬성이나 어떤 쪽에 서든 그로 인해 얻는 부수적인 이득들은 다른 것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다른 것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만큼은 다른 것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생명을 존중하는  사고 방식이다.
태아가 생명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없지 않지만 태아를 생명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지켜주고자 노력할 경우 지불해야 하는 댓가들이 무엇이든 간에 얻는 가치는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가 없는 가치이다.
태아를 생명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손해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들인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생명 존중 사상이 훼손 되고 나서 얻는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 있어 최후까지도 지켜야 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태아든 가난한 자이든 병든 자이든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태 근절 운동에 앞장서든 찬성 운동에 앞장서든 그것으로 인해 잃는 것이 무엇이고 얻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다른 것을 통해 절대 없을 수 없는 것.
유일하게 낙태를 하지 않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또 그런 노력으로 인해 더 고양되는 것.
그것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의무일 것이다.
비록 그 가는 길이 멀고 가시밭길이 될 지언정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가 아니라 임신한 여성과 태아 자신에게 그렇다는 말이다.
현재 온갖 난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는 그 사실이  그것을 냉엄하게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장애나 사회적 편견 혹은 경제적 어려움 등 삶의 고통 때문에 자살해서 죽은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태어나 사는 것이 고통일 것이므로 하루라도 고통의 기간을 줄여 주기 위해 뱃속의 태아를 태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든 간에 어느 태아에 대해서고 살 가치 없다는 말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강간으로 태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모두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이 아니라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임신된 모든 태아에게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태어나게 도와 주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나는 살 자격이 있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지만 너에게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불공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어날 기회를 주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건강하고 밝게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함께 도와 주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삶이 고통 그 자체이고 죽지 못해 살고 있다고 말을 하더라도 아직 죽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 삶을 유지할 기회가 여전히 주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러므로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 말과 행동은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하물며 아무 잘못도 없고 또한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태아에게라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태아들이 스스로 결정할 힘이나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구실을 들어서 미리 없애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된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