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비중에 따른 사회경제적 가치 VS 생명의 가치에 관하여
개인적 가치 판단도 그렇고 사회적 분위기나 제도도 시간에 따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변하게 마련이다.
그러고 그러한 개인적 혹은 사회적 가치 판단이 기댈만한 어떤 절대적 기준이나 객관적인 잣대가 없다.
따라서 각 나라에 따라 그 기준은 제 각각인 것이 현실이며 낙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성 혹은 가족이라는 성인 인간의 비중과 그들의 사회경제적 안녕이라는 것이 갖는 가치,
그리고 태아라고 하는 존재의 비중과 그 태아의 생명이라고 하는 가치.
이 둘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판단에 따라 그 사회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는지 결정이 된다.
여성과 같은 성인과 태아의 존재의 비중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성인에 대한 비중이 월등이 크게 받아 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사회 경제적 가치와 생명의 가치도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이며 생명의 가치는 사회 경제적 잣대로 가를 수 없는 무한대 또는 매우 큰 것이라는 것 또한 상식적인 판단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비중 x와 사회 경제적 가치 a의 곱인 xa와 태아의 비중 y와 생명의 가치 b의 곱인 yb 중 어느 것이 더 큰 것일까?
태아의 비중을 0으로 하는 경우라면 즉 태아는 산모의 뱃속에 들어 있는 존재로 전혀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생명 박탈이든 무어든 일고의 배려도 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면 어떤 경우도 xa가 크다.
그러나 만일 태아의 비중을 0이 아닌 것으로 한다면 무한대의 생명의 가치가 있는 yb가 더 크다.
결국 태아의 비중을 여성 혹은 성인의 100분의 1 아니 1000 분의 1이라도 감안해 주느냐 아니면 전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보느냐 하는 것이 그 사회의 낙태 문제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만일 태아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해서 그 비중을 0으로 둔다고 해서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면 자신의 의사를 말할 수 없는 식물 인간 상태의 인간이나 외부와 어떤 의사 소통의 방법도 갖지 못한 장애인의 경우에도 그들의 의사는 전해 배려 하지 않고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명의 가치를 무한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생명의 가치를 사회 경제적 가치와 비슷한 것이거나 혹은 그저 몇배수 정도라고 한다면 현실적으로 존재의 비중이 적다고 치부되는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실제로 장애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의견이 무시되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명의 가치는 어쩌면 때에 따라서는 존재의 가치가 큰 부자나 권력자의 사회 경제적 가치보다 작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런 현상이 지금 많은 미개발국, 인권이 낮은 나라에서 보이는 사회 현실이다.
그러나 올바른 인식을 가진 사회에서 존재의 비중이 큰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 이득에 따라 존재의 비중이 작은 사람들의 생명권이 박탈되는 경우는 없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에서는 존재의 비중이 작은 사람들이 사회 경제적으로 다소 불이익을 받고 불편을 받을 수는 있지만 최소한 그들의 생명권만큼은 보장을 해 주고 있다.
즉 생명권은 누구에게나 무한대의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태아의 존재의 비중을 0으로 간주하지만 않는다면 그 아이들의 생명권의 곱은 어떤 경우의 사회 경제적 가치의 곱에 우선 할 것이다.
어렵게 돌려서 이야기했는데 결론은 한마디이다.
여성이든 누구든 개인의 생명권을 희생하지 않는 개인적 차원의 사회 경제적 이득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우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결국 약자들의 생명권은 상황에 따라 쉽게 위협 받게 될 것이고 이것은 약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함께 삶을 영위하도록 할 의무가 있는 사회와 국가가 개인이 발휘하지 못하는 힘을 대신하여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자의 대상에서 태아도 예외는 아니다.
2010년 7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