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이야기

낙태백서 - 어느산부인과 조산사의 고백

junihome 2010. 5. 31. 11:01

인터넷에서 읽은 글입니다. 내용(낙태비용)으로 봐서는 조금 지난 글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낙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로서 충분히 현장을 느끼게 해줍니다.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는 데 부담을 느끼겠지만, 이런 부담스러운 일이 더 이상은 계속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글을 옮겨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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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백서 - 어느 산부인과 조산사의 고백

 

조산사(助産士) 자격증을 획득하고 조산사 자격을 획득한 후 85년에 경기도 내에 있는 종합병원에 들어가 1년 5개월간 근무했다. 그 다음에는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개인병원으로 옮겨가 1년간 근무했으며 그 후에 準종합병원으로 옮겨가 3년을 근무했다. 그러니까 내가 산부인과에서 근무한 기간은 총 5년 5개월에 이른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낙태를 접했다.  

 

종합병원에서는 비교적 낙태율이 낮았음에도 매일 몇 건의 낙태가 이루어졌다. 개인병원에 있을 때 특히 낙태가 많았는데 하루에 20-30건씩 이루어졌다. 임신 초기단계는 수술로 간단히 끝나기 때문에 링거병을 들고 들어가 간단한 보조 일만 하면 됐지만 6개월 이상 된 경우에는 분만실로 옮겨지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내가 직접 낙태를 도와야 했다. 젊은 의사들의 경우 대강의 수술만 해놓고 뒷처리를 부탁하는 바람에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주로 16주 이전에는 흡입기를 이용해 비교적 간단히 수술 할 수 있다. 16-20주가 가장 위험하므로 산부인과 의사들은 그 기간의 낙태를 꺼리는 편이다. 20주가 넘으면 이미 아이가 많이 자란 상태이므로 흡착기로는 불가능해 유도분만을 해야 한다.  분만을 위해서는 우선 인위적으로 자궁구가 열리게 해야 한다. 5개월일 때는 헤파린 종류인 라미나리아를 자궁 입구에 밀어 넣는다. 그러면 그게 점점 불어나면서 자궁이 열리게 한다. 몇 개 넣지 않아도 자궁이 열리는 경우가 있으나 17개까지 집어넣은 경우도 있었다.  자궁을 열리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골프백을 집어넣는 일이다. 부지백이라고도 부르는데 풍선처럼 생긴 것을 돌돌말아 자궁 안에 밀어 넣은 다음 그 풍선 안으로 셀라인(생리 식염수)을 집어넣는다. 갑자기 자궁 안에 풍선이 들어온 데다 점점 부풀어 오르니 산모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불안해진 태아가 자궁 안을 마구 돌아다니게 된다. 자궁이 충분히 열리면 골프백을 힘껏 잡아당긴다. 그때 태아가 함께 딸려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태아가 딸려 나오지 않으면 손을 집어넣어 끄집어내야 한다. 손을 집어넣으면 태아가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기 때문에 그 일도 쉽지가 않다.  겨우 발을 찾아 손가락을 두 발에 걸면 생명의 위협을 직감한 가련한 태아는 마구 요동치면서 빠져나가려고 기를 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곽 잡아 힘껏 잡아당길 수밖에 없다. 대개 6-7개월 된 태아들의 발은 어른 손가락 두 마디 만한데 그 발을 잡아당기는 기분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묘하다고 해야 할까? 머리를 으깨 끄집어내는 경우도...... 하지만 그 순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끄집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별다른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막상 끄집어낸 태아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이물질이 들어오면 살기 위해 자궁 안을 필사적으로 헤집고 다니기 때문에 여기 저기 충격이 가해져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특히 다리 부분은 시커멓게 죽어있다. 그런 태아들을 보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측은함이나 생명의 존엄성 따위보다는 몹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병원 분만실에는 미혼에다 나이 어린 간호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사(死)태아 처리를 모든 꺼려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애들을 다그치기보다 차라리 내가 처리 하는 게 낫지 하는 생각으로 끝까지 일 처리를 담당했다. 그렇게 꺼낸 태아들은 바로 한지에 싸서 냉동창고에 넣어두면 死태아 처리를 하는 인부들이 와서 거두어 간다. 골프백과 함께 딸려 나온 태아는 대부분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처리하기가 쉽지만 손가락으로 끄집어내면 태아가 가끔 살아 있는 경우도 있다. 곧 죽을 것이 뻔한 그 태아들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잠시 숨을 쉰다. 그러나 아무런 배려도 받지 못한 채 곧 숨이 끊어지고 死태아 처리반으로 직행하게 된다.

 

골프백으로도 처리가 안 되고 손으로 끄집어낼 수도 없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발이 아니라 머리 쪽이 자궁을 향하고 있으면 잡아당기기가 힘들기 때문 에 링펄셉을 이용해 끄집어 내야한다. 하지만 그것도 안 되면 자궁 안에서 분쇄를 해야 한다. 특히 머리를 분쇄하여 흡입기로 빨아 당긴다.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아이를 끄집어 내놓고 보면 그 참혹함에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나는 그런 수술이 있는 날 밤이면 꼭 기분 나쁜 꿈을 꾸곤 했다. 크고 검은 드럼통 옆에 서서 끝없이 아이들을 그 속으로 던지는 꿈이었다. 그런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 한 밤중에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내가 분만실에 근무하는 조산사인 이상 그런 일을 피해 갈 수는 없는지라 나는 대부분 무감각하게 그 일을 하려고 애썼다. 좀 더 신속히, 좀 더 깨끗이 일 처리를 하는 것으로 나를 달랬다. 그리고 남을 대신해 내가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6개월 이상 되어 유도 분만을 하는 경우 분만 때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제왕절개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20대 후반인 임신 8개월의 이혼녀는 이제 아이가 필요 없게 되었으니 낙태를 해달라고 망설임 없이 얘기했다. 그러면서 고통을 느끼기 싫으니 아예 제왕절개로 해달라는 것이다. 8개월인 경우 제왕절개를 하면 아이가 살아 있을 확률이 대부분이므로 마취를 심하게 하여 아이를 죽게 한 후 수술한다.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살해되는 아이들...... 개인병원에 있을 때는 보통 이틀에 한 번은 이런 수술을 했다. 내가 5년 5개월 동안 산부인과에 근무하면서 평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유도분만을 통한 낙태아 처리를 했으니 얼마나 많은 아이가 무참하게 죽어 가는 일에 힘을 보탰는지 모르겠다.

 

보통 3개월 이전에 낙태를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性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임신을 한 것을 속히 알아차리고 깨끗이 처리하기를 원한다. 6개월이 넘어서 유도 분만을 통해 낙태를 하려는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미 딸을 둔 부부가 다시 딸을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낙태를 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청소년들이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어 뒤늦게 병원을 찾는 경우이다.

 

어느 날 딸들을 가진 부부가 만삭의 몸으로 병원을 찾아와 낙태수술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들은 생활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고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딸은 둘이면 충분하니 낙태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 부인은 9개월이 가까워 오는 시점이어서 배가 남산만 했다. 유도분만을 한 후 산모는 회복실로 옮겨갔다. 태어난 아기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기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충격에 의해서 죽게 마련이나 그 아기는 살아 있었다. 죽어야 할 아기이므로 태어나면 누구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간호사들이 약이나 주사기를 담는 스테인리스 통을 바트라고 부르는데 거기다 담아서 한쪽에다 밀어 놓는다.

 

그날 유도분만으로 태어난 아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 놓았다. 우유도 안주고 목욕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방치하면 대부분의 아기들은 곧 죽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른 병실을 둘러보고 돌아와 보니 어린 간호사들이 난리가 났다.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기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아주 드문 경우였다. 나는 곧바로 아기에게 달려가 보았다. 쌕쌕 숨소리를 내는 그 아기는 분명 살아 있었다. 순간 이 아기를 살려 입양기관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기를 더운물에 씻기고 배꼽처리를 한 다음 인큐베이터에다 넣었다. 세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지라 아기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래서 따듯한 물주머니를 만들어 발치와 몸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아기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밤 10시쯤 전화가 왔다. 아기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 아기를 처리하기가 무서운 간호사들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아기는 가련하게도 죽어 있었다. 나는 그 아기를 정상적으로 태어났다가 죽은 아기와 마찬가지로 솜으로 여기저기 막고 잘 싸서 냉동창고에 넣어 주었다.

 

너무나 쉽게 아기를 죽이는 부모......

간혹 살아서 나오는 아기들을 보면 주로 여자 아기들이다. 여자들의 생명력이 질기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간혹 미숙아들이 태어나면 인큐베이터에다 넣는데 그럴 경우에도 여자아기들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살아서 나온 아기들 때문에 일을 치르고 나면 가슴은 아프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단지 그런 아기들을 처리하면서 다시 세상에 온다면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라고 마음속으로 빌어준다.

 

좀처럼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몇 개 있는데 난쟁이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기가 죽었다고 말한 후 우리에게 아기를 없애달라고 하였다. 당시만 해도 나는 입양기관이 어디 있는지 잘 몰랐고 내가 주도적으로 일 처리를 하는 입장이 아닌지라 의사의 지시에 그대로 따르는 편이었다. 갓 태어난 난쟁이 아기는 한 모금의 우유도 먹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기이므로 병원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트에 넣어 그냥 두면 그 아기는 그대로 죽어버리고 만다. 입양기관에서도 기형아들은 데려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아기들을 입양시키기도 사실은 힘든 일이었다.

 

또 한 번은 항문이 없는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는 몇 번에 걸쳐 수술을 해야만 정상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다고 했다. 수술비만 해도 3천만 원이 든다는 얘기였다. 그 아기의 부모는 그 정도 돈을 들일 수 없다면서 아기를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 아기에게는 아주 조금씩 우유를 주었다. 많이 먹을수록 일찍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 아기는 더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그 아기는 사흘 만에 얼굴이 노랗게 되어서 죽고 말았다.

 

그 후에도 단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분만 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낙태를 시켜 달라는 부인들을 수없이 만났다. 8개월이 지나 명백히 딸이라고 판정이 되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낙태를 하는 것이다. 보통 3개월 이전에는 간단히 흡입기로 수술이 되기 때문에 살인이라는 생각을 별로 가지지 않지만 6개월 이상 되는 태아를 유도 분만하는 행위는 명백한 살인 행위임을 부인할 수 가 없다. 나는 눈 코 입이 선명한데다 손발이 버젓이 있는 그 아기들을 끄집어낼 때마다 아기를 살인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 작을 뿐인 그 아기들은 갓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바가 별로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들 선호사상과 인명 경시 풍조로 인해 불과 두서너 달 후면 태어날 아기들이 무참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방을 들고 병원 찾는 여고생도 고등학생들도 유도 분만을 통해 낙태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들이 임신을 하는 때는 주로 크리스마스와 바캉스 철이다. 임신중절 수술을 하러오는 아이들의 달수를 따져보면 대부분 그때 임신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아이들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다급해지면 달려와서 울면서 낙태를 시켜 달라고 말한다. 그때는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와 함께 와서 낙태를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간단한 낙태수술은 6만 원 선이었고 유도분만은 50만 원 선이었다. 한 번은 고등학교 1학년인 두 아이가 일을 벌려 여자아이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주변에 알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복부를 동여매는 데만 급급했다. 원래 아이가 좀 뚱뚱해 어머니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했다. 더 이상 숨길 처지가 되지 못한 아이가 울면서 어머니에게 일을 털어놓았고 급기야 남자 쪽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기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꽁꽁 매놨던지 태어난 아기가 2.45 kg밖에 되지 않았다. 아기는 입양기관에 넘기기로 하였다.

 

문제는 남자 쪽 어머니 태도에 있었다. 두 집 다 그리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는데 남자 쪽은 행여 수술비를 내야 할까봐 지레 발을 빼려고 안간힘이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러냐는 식이었다. 딸 간수를 잘해야지 도대체 이게 뭐냐고 오히려 큰 소리였다. 여자 쪽 어머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수술비만 좀 보태달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보다 못한 내가 남자 쪽 어머니를 병원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당신 아들은 아무 고통도 당하지 않는데 저 집 딸은 어떠냐,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분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그리고 10개월 간의 악몽이 지워지겠느냐. 돈 몇 푼이 아까워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해서 되겠느냐.” 내가 마구 다그치자 그제야 아주머니는 잠잠해졌다. 나는 악착같이 남자 쪽 어머니에게 수술비를 받아냈다. 단 한 번의 실수라던 말대로 처녀막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여학생이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병원에 있으면 별별 일이 다 많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 얼굴이 두꺼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떼 지어 병원으로 들어오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아이들은 수술하러 들어가는 아이를 무슨 환송식 하듯 뒤에서 재잘거린다. “잘하고 와, 별거 아냐.” 뭐 그런 말을 한다. 그리고는 수술이 끝나고 나면 간단한 주사라도 한방 맞고 나온 것처럼 대단찮게 여기며 “아팠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쩌구 하면서 수선을 떤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병원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불안해진다.

 

한 번의 실수로 생명이 생기고 쉽게 사라지고...... 정말이지 안타깝습니다. 애를 지우는 것이 낳는 것보다 2배, 3배로 여자 몸에 나쁜 거 아세요? 몸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여자의 몸 정말 소중하고 귀중한 것입니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평생 죄인처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ㅜ.ㅜ.